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처녀지 개간 운동 (문단 편집) == 일시적인 성공 == 어쨌든 흐루쇼프는 이 계획이 [[파멸]]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기차에 몸을 실었다. 국가적으로 이 사업을 팍팍 밀어줬기 때문에 젊은 [[소련 공산당]]원들과 [[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|러시아]], [[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|우크라이나]]에서 온 주민들 30만 명 가량이 처녀지 개간 사업 예정지인 [[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|카자흐스탄]], [[시베리아]], [[우랄 산맥]] 지역으로 몰려들었다. 처녀지 개발 계획에 [[트랙터]] 5만 대와 [[트럭]] 6천여 대를 투입하였고 [[주택]]과 [[도로]] 같은 기초적인 [[인프라]]를 건설하면서 [[농사]]를 짓기 시작했다. 그러나 농사에 미숙한 이들이 많았고 상식적인 [[농학자]]들은 이곳은 원래부터 [[강수량]]이 부족하던 지역이라 휴경을 많이 하고 파종을 늦게 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엉터리 과학자인 [[트로핌 리센코]]는 조기 파종과 휴한기 없는 집약적 경작을 계속 주장했고 [[날씨]]도 그리 좋지 않아서 [[1955년]] 농사는 대실패로 끝나 버렸다. 하지만 흐루쇼프는 1년차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승부수를 걸었고 첫 시도와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3500만 헥타르에 달하는 신규 농경지를 화보하였다. 거기에다 새로 정착한 공산당원들도 경험이 쌓였던 모양이다. 그리하여 [[1956년]] 농사는 소련 전역이 [[가뭄]]의 영향으로 흉작이었음에도 유독 흐루쇼프가 지원을 아까지 않았던 카자흐스탄에서만큼은 대풍년이 들어 소련 전체 수확량 8500만톤 가운데 2700만톤을 처녀지에서 수확하는 성과를 거두어서 흐루쇼프는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확고히 다지는 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성공 이후 계획을 더욱 확대해 최종적으로 4180만 헥타르까지 계획이 확대되었으며 이 때문에 북부 카자흐스탄과 우랄, 남시베리아에서 막대한 농산물을 추가로 수확할 수 있었다. 1954년 소련의 곡물 수확량이 8550만톤이었는데 1960년에는 1억 2500만톤으로 늘어났고 개중에 5800만톤을 카자흐스탄과 남시베리아, 우랄에서 수확했으니 당시 통계만 봐도 초기에 엄청난 대박을 쳤던 것은 사실이었던 셈이었다. 여기에서 그쳤다면 흐루쇼프는 괜찮은 농업정책을 편 지도자로 남아 있을 수 있었겠지만..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